박원순 서울시장 사망에 대한 개인적 고찰
7월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망했다.
이에 대해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그렇게 허망하게 갈걸 뭐 할라고 아웅다웅 살았나"라며 이같이 토로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인간의 삶에 대해서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이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것,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있을까?
이에대해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하는 물음이 있다.
과연 "왜 인간은 살아가는가?"이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인마다 다른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지만 사실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사람은 자기를 스스로 규정하기 힘들다.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 주위사람들의 평판에 의해 나의 사고가 형성되고 그를 바탕으로 내가 결국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정한 삶의 이유라도 그 목적을 설정한 배경에는 사회적, 문화적 관계적 요소들이 녹아들어있다.
이는 시대에 따라서도 변해왔다. 원시시대에서 삶의 목적의 가장 큰 이유는 종족의 번식, 생존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삶의 이유는 명예, 혹은 종교적 교리를 따르기 위해, 등으로 변해왔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를 축척하는것, 으로도 많이 형성되어 온듯하다.
그러나 가장 많은사람들이 삶의 목적으로 가장 많이 꼽는건 아마 '행복'일 것이다. 이세상에 태어나 행복을 최대한 느끼는게 삶의 이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이유를 행복으로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이에대해서는 또 하나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게 된다.
바로 미래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경우 삶의 목적성 상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명확하게 "앞으로의 삶이 큰 고통이고 엄청난 불행이 닥쳐올것이다. 평생 너의 이름에는 불명예가 씌워질 것이며 앞으로 얻을 행복들로는 절대 불행을 덮을 수 없을것이다. " 라는 운명이 다가왔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합리적인 사람의 선택은 무엇일까?
아마도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게 오히려 현명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의 발전, 철학의 발전에따라 사람들의 삶의 이유는 변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삶의 이유를 '개인의 발전'에 두고 살아가는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